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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제 축제 학술대회 및 답사

공연·축제·특강·전시·세미나

by Doctorkim 2023. 10. 1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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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제 축제와 더불어 학술대회 및 답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래는 유적답사와 관련해 공개된 설명입니다.


제2회 중고제 축제 유적답사(2023년 10월 22일)

중고제 판소리를 집대성한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은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로 이주해 김창룡을 낳았으며, 김창룡과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 태생의 이동백을 가르쳤다. 또한 서천군 화양면 대등리에는 ‘시조’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관서악부>를 지은 석북 신광수의 묘소가 있다.

● 용당포(장항읍 원수리 909-11)

장암리의 전망산과 장암진성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용당포는 해양문화와 내륙문화가 만나는 접점이었다.
용당포는 용당산 아래에 있었던 포구이다. 이곳에 용이 살았다고 믿었는데 용당산은 용의 머리이다. 용의 머리에 당집이 있다 해서 용당이란 이름이 나왔다. 이곳 사람들은 ‘용댕이’라 불렀다.
지금의 원수2리 용당산 아래의 마을이 용당리이며 이곳에 있는 용당진, 또는 용당포는 서천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예로부터 군산을 오가는 나룻배가 있었으며 1960년대 초까지 도선장은 이곳에 있었다.
배 3대가 왔다갔다 하면서 60년대 초까지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용당포는 장항의 중심, 서천의 중심가였다. 금융조합도 여기에 있었고 시장도 장항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구장터라고 하는데 장항중학교 담 뒤가 장터였다. 어선이 닿고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주변은 천혜의 어장이었다. 참게, 황복, 뱀장어가 지천이었다.
용당산 당집에서 용왕제를 지냈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에도 기록되고 있는 용당진사(龍堂津祠)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 백제시대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가가 주관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용당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웅진명소(熊津溟所)로 지정돼 용왕제를 지냈으며 웅진에서 향과 축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전한다.
명소란 샘이 흐르다 고이는 곳으로 용이 산다고 믿었던 곳이다. 용의 몸통은 성주리로 이어져 왕재산에 이르는데 성주리는 김정근(1839~1895)이 강경에서 이거해 살던 곳으로 김창룡(1870~1943)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이동백 생가지(종천면 도만리 180)

이동백(1867~1950)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희리산 기슭에 있다. 희리산 중턱에 그가 소리 공부를 하며 득음을 했다는 용굴이 있다. 생가지에는 서천군에서 세워놓은 표지석이 있으며 생가지에 있는 가옥은 서천군이 매입했다.

● 김창룡 생가지(장항읍 성주리 389-1)

김창룡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이곳에서 그는 부 김정근으로부터 도만리에 사는 이동백과 함께 소리를 배웠다.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으나 국토교통부의 '2021년 제3차 도시재생 뉴딜사업공모’에 선정되어 ‘성주마을 사이상생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생가지를 중심으로 문화공간을 계획하고 있다.

● 석북 신광수 선생 묘소(화양면 대등리 269-3)

석북 신광수(1712~1775)는 1760년 49세 되는 해 가정의 경제난 해결을 위해 관서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관서록’을 썼다. 석북은 그것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관서의 실경을 실감나게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를 13년이나 지난 1774년 63세에 비로소 번암의 전별시를 통해 쏟아냈다. 이것이 바로 108수의 <관서악부>이다.
2014년 10월 30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대등리 석북 신광수 묘역에서 시조명칭 유래비 건립 및 석북 문학제가 열렸다.
시조 명칭 유래비 앞면에는 고체로 쓴 ‘시조명칭 유래비’ 와 ‘관서악부15 원문이 쓰여 있고 뒷면에는 시조 명칭 유래와 참여단체, 명단 등이 적혀있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 시인 신광수가 쓴 「관서악부 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으로부터이다 一般時調排長短來自長安李世春’라고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부터 ‘시조’ 라는 명칭이 종종 쓰이다가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문학의 영향으로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창가·신체시·자유시 등이 나타나 이들 시형과 구분하기 위해 음악 곡조 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 분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전통 문학의 위상을 높 이는 일과 신광수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문학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일이기에, 우리 민 족의 기념비적인 시조명칭 유래비를 석북 신광수 선생의 고향 충남 서천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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